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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과 �한하운시초� 475
논문
한하운과 �한하운시초�1*
최원식(인하대)
목차
1. 초대받지 못한 시인
2. 이데올로기와 텍스트
3. 한하운의 재탄생
4. 하위자의 시적 발화
5. �한하운시초�의 계보
국문요약 : 한하운과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1949)는 본격적 비평의 대상이 되어오지 못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문둥이시인이라는 데 말미암거니와, 더구나 그를 발굴한 이병
철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북했다. �한하운시초� 초판(1949)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한하운
은 이병철의 부재로 전후 남한의 시적 고아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 시집을 낸 정음사는
초판의 좌익적 체취를 걷어낸 재판(1953)을 출판함으로써 한하운을 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전후 남한의 경직된 반공분위기 속에서 한하운은 졸지에 좌익으로 공격받고, 시집 또한 좌
경으로 매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화를 거쳐 오히려 한하운이 남한사회에 연착륙하게
되면서, 시인 한하운은 사라지는 역설이 실현된다. 제2시집 �보리피리�(1955)는 그 단적인
표현이다. 이 힘겨운 생존과정 때문에 한하운과 그의 시는 명성에 반비례하여 일종의 풍문
으로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둠에 묻힌 �보리피리� 이전 한하운 전기를 점
검하는 한편, 그의 시의 백미라 할 �한하운시초� 초판(1949)에 대한 원전비판을 수행할 것
이다. 요컨대 한하운은 좌익/ 우익 바깥의 하위자다. 그의 시는 하위자 최초의 시적 발화로
서 한국현대시사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하운시초� 초판은 고은, 신경림,
* 이 논문은 인하대학교의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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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박노해 등, 1970년대 이후 한국민족문학/ 민중문학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됨으로써
더욱 종요롭다.
주제어:한하운, �한하운시초� 초판, 이데올로기, 원전비판, 문둥이, 하위자, 이병철, 정현
웅, 최영해, 오소백, 민족문학/민중문학
1. 초대받지 못한 시인
명성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시인들이 없지 않다. 한하운(韓何雲, 191
9~75)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나(癩)시인’이라는 호명1에서 보듯, ‘나병’이 ‘시
인’을 압도한 탓인지 문단, 평단 그리고 학계 모두 그를 시인으로만 보는 데
는 은연중에 인색한 듯도 싶다. 이 점에서 �한하운 전집�2의 출간은 획기적
이다. 그럼에도 이 전집은 원전비판(textual criticism)과 전기비평(biographical criti-
cism)이 미흡하다. 함경남도(咸鏡南道) 함주(咸州)군 태생의 한센인으로 남쪽에
서 논란을 거쳐 자리잡는 1950년대 중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2시집 �보리
피리�(1955)를 내기까지 그의 전반생은 장막에 가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이 전집에 전기비평적 성과가 없지는 않다. “그동안 1919년으
로 알려졌던 그의 출생시점을 1920년 3월 10일로 바로잡”3은 것이다. 그런데
내가 소장한 파란 표지의 제2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된 연보에 의하면 “檀紀
四二五二年二月二十四日生(當三七歲)”4 즉 1919년 2월 24일생이다. 이는 시인
이 직접 작성한 가장 이른 연보이거니와, 첫 시집 �한하운시초�에는 초판․
1 이 호칭은 한하운을 발굴한 이병철(李秉哲)이 처음 사용하였다. 이병철 選, 「癩詩人 韓何
雲詩抄」, �新天地�, 1949.4, 176면.
2 탄생 90주년이자 서거 35주기를 맞아 인천문화재단이 조직한 전집 편집위원회(윤영천․
유성호․김신정․이현식)가 엮은 총 867면에 이르는 �한하운전집�, 문학과지성사, 2010
(이하 이 책은 �한하운전집으로� 표기).
3 「책머리에」, 위의 책, 12면.
4 한하운, �보리피리�, 인간사, 1955,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