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세계 문화상식 series 1 · 2010. 1. 19. · ‘순장’을 할 때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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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세계 문화상식 series 1

Transcript of 재미있는 세계 문화상식 series 1 · 2010. 1. 19. · ‘순장’을 할 때 죽은...

재미있는 세계 문화상식

series 1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와 대화를 하는 행위인 기도는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신께 기도를 드리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대부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지긋이 감은 자세로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기도할 때면 왜 손을 모으는 것일까? 어떤 특별한 의미라도 담겨 있는

걸까?

기도할 때 손을 모으는 행위는 9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종교 역사가들은 이러한

습관을 복종의 의미로 해석한다. 밧줄이나 수갑은 법질서를 지키는 도구로서 복종의

의미를 담고 있다. 죄수들의 손을 모아 밧줄 로 묶거나 수갑을 채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중세 시대에도 영주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손을 모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손을 모으는 복종의 행위가 지금의 기도하는 자세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소리내면서 먹는 것이 도리어 올바른 식사 예절이다. 이렇게 식사 예절은 나라마다 모두 다르다. 그럼 필리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음식을 먹고 난 후 맛있다고 칭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라마다 식사 예절이 조금씩 다르다. 필리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음식을 먹고 난

뒤 크게 트림을 하는 것이 잘 먹었다는 인사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는 그릇에 음식을

조금이라도 남겨 놓지 않으면 음 식을 더 달라는 뜻이기 때문에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다면

음식을 남겨야 한다. 또 요르단, 필리핀, 이집트에 서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

바른 행동이다. 반대로 인도네시어 사람들은 음식을 남기면 아주 기분 나빠한다. 음식을

남기는 것은 맛이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왜 손을 모으는 걸까?

다른 나라는 음식을 먹은 뒤 어떻게 인사할까?

상투란 옛날, 결혼한 남자의 전통적인 머리 모양으로 머리카락을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맨 것이다. 남자들이 상투 튼 모습을 고구려 벽화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조상들은 무척 오래 전부터 상투를 틀었다. 그런데 많은 머리카락을

모아 정수리 위에 틀 경우, 머리의 열이 빠져 나가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동그랗게 깍아 내게 되었던 것이다. 상투는 1895년

을미 개혁 때 내린‘단발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옛날 여자들은 15세기 되거나 혼인

약속을 한 다음에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이런 의식을‘계례’라고 한다.

우리가 추석에 송편을 먹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추수 감사절에 칠면조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

왜 칠면조 고기를 먹는 걸까?

우리 나라의 추석과도 비슷한 미국의 추수 감사절은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큰 축제일이다.

이 추수 감사절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청교도인들이 1621년 11

월 마지막 목요일에 첫 수확을 신께 감사하며 3일간 축제를 벌인 데서 시작되었다. 그 때

이민단의 우두머리였던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근방에 살던 인디언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야생 칠면조 요리를 함께 나눠 먹으며 개척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칠면조 고기를 먹던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추수 감사절은 매년 11월의 네번째 목요일이며, 1863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 국경일로

정해졌다.

상투 틀 때 정수리 부위는 어떻게 했을까?

미국에서는 추수 감사절에 왜 칠면조 고기를 먹을까?

우유에 달걀, 향료, 설탕 등을 녹여 크림 모양으로 얼린 과자를 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은 아주 오래 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약 4,000년 전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오늘날에 우리가 먹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익힌 쌀에 양념을 하고

우유를 넣어 만든 반죽을 눈 속에서 얼린 것이었다.

이것은 아이스크림이긴 하지만 밀크 아이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국 다음으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는데,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가 제조법을 배워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이다. 그 후 1670년에는 시칠리아인인

프란시스코 프로코피오가 파리에서 간 이 식당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큰 인기를 얻어 파리에서만도 아이스크림 만드는 곳이 250여 곳이나 생겨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진 것은 프랑스 플로렌스

지역의 제과공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갖가지 색으로 모양을 낸 종이 위에 대나무로 가로 . 세로 또는 모로 엇맞추어 뼈대를 만들어 붙인 후, 실에 이어 공중에 띄워

올리는 놀이 기구를 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 여왕 때 김유신 장군이 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연이 처음 만들어진 나라보다 약 800년이나 뒤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연은 어느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또 어떤 용도로 쓰였던 것일까?

연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연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연의 색깔이나 무늬,

움직임을 군사용 신호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연을 띄워서 적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암호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또 중국인들은 연애 사람을 매달아 공중으로 날려 보기도 했다.

대나무와 창호지로 아주 크고 단단하게 만든 연에 사람을 밀착시킨 다음 두꺼운 밧줄에 매달아

강한 바람을 이용해서 하늘에 날렸던 것이다. 연이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인 묵자에 의해서였다. 또한 연의 몸체에 기상 자동 기록기(메테오로 그래프)를

달아서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은 기상학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이스크림은 어느 나라에서 처음 만들었을까?

연은 처음에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흔이 청바지라고 불리는 블루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늘날, 멋쟁이들 사이에서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는 청바지가 처음에는 옷이 쉽게 해어지던 광부들을 위해 천막이나

포장마차를 만드는 튼튼한 천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천막용 천은 청색이 아닌

갈색이었다. 그렇다면 왜 갈색 천을 청색으로 물들이게 된 것일까?

블루진은 19세기 중반 무렵 미국의 리바이 스트라우스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서부 개척 시대를 맞이하여 광부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의류

도매업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그는 남아도는 천막 천으로 금을 캐는 광부들의 작업복을

만들었는데, 천이 어주 튼튼해서 작업복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리고 갈색 천을 특별히

파란색으로 물들인 것은 독사 때문이었다. 뱀을 쫓는 약초로 물들인이 바지가 광부들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리바이스’라는 청바지 회사는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청바지 호주머니에 쇠붙이가 달려 있는 것도 이유가 있다. 쇠붙이로 붙이면 광부들이

무거운 광석을 호주머니에 잔뜩 넣어도 뜯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이나 환갑과 같은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게 되면 보통 축하의 뜻으로 종투 안에

얼마간의 돈을 넣어주곤 하는데 이를 축의금이라고 한다. 이렇게 축의금을 전하는 것은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축의금을 줄 때 특별한 봉투를 사용한다고

한다 과연 어떤 색일까?

중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붉은색을 좋아한다. 그레서 좋은 일을 가리키는 말에도 붉을 홍(

紅)자가 들어간다. 결혼식은 홍사(紅事), 축의금 넣는 봉투는 홍포(紅包), 행운은 홍운(紅運)

이라 한다. 특별히 붉은 봉투에 축의금을 넣는 이유는 붉은색이 행운의 색일 뿐만 아니라

귀신을 아 주고 봉투 속의 돈이 불처럼 활활 일어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봉투뿐만

아니라 결혼식이나 명절날 선물을 보낼 때에도 붉은색의 종이에 싸서 보낸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며 내는

조의금만 흰색 봉투에 넣어 준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혼 축의금을 흰색 봉투에 넣어 주면 뺨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청바지는 왜 청색이 되었을까?

중국에서 축의금을 넣는 봉투 색깔은?

인도 반도의 북서부에 위치한 인더스 강 유역에 잇는 파키스탄은 인더스 문명을 꽃피운 인류 문화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파키스탄에서는 특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직업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직업을 가진 이들의 손을 신의 손으로 여기며, 그들이 만든 음식은 신이 만든 음식이라고

믿고 있다. 과연 그들의 직업은 무엇일까?

파키스탄에서는 사람의 머리에 신의 은총이 내린다고 믿는다. 따라서 파키스탄에서 남의 머리를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발사만은 마음놓고 남의 머리를 만질 수 있기 때문에 파키스탄

사람들은 이발사를 존경스러운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파키스탄의 이말사는 머리만

만지는 게 아니라‘비라니’라는 죽을 쒀서 손님에게 대접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발사가 만든 죽을

먹으면 행운이 온다’는 사람들의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파키스탄의 이발사들은 서민들에게 주례

선생님으로도 인기가 높다.

‘요들레이 요들레이 요드리 오오~’. 리듬이 경쾌하고 즐거운‘요들 송’이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위스 사람들이 요들 송을 부르게 된 이유는 뭘까?

중부 유럽에 위치한 스위스는 눈이 많이 내리는 알프스 산간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눈이

많이 내리면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산울림을

이용해 먼 산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해 부르게 된 것이 바로 요들 송이다.

요들 송은 1세기경 ‘알펜호른(가축 떼를 모을 때 쓰이는 원시적인 호른)’이란 관악기 소리를

흉내낸 데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점차 이 뜻 없는 소리가 신화가 되어 이웃과 소식을 나누는

수단이 된것이다. 그리고 요들 송이라는 정겨운 스위스 민요로 정착되었다. 스위스와 근접해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요들 송이 민속 음악의 일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직업은?

스위스인들은 왜 ‘요들송’을 부를까?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서당에서 천자문을 외우던 아이들의 소리가 하늘을 찌를 때가 있었다.

조선 시대 서당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 자리를 보통 떠돌이 지식인이나 마을에서 글공부를 많이

한 유식한 노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서당에서는 책 한 권을 뗄 때마다 간단히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데 어

떤 잔치였을까?

조선 시대 서당에서는 매일 시험을 보아 어느 단계가 되어야 그 다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서당에서 글을 배우던 학동이 책 한권을 다 떼면 ‘책거리’라는

간단한 잔치를 벌였다. 책거리란 책을 뗀 아이의 부모가 음식을 마련해 스승과

동부들에게 한 턱 내는 것을 말한다. 책거리는‘책씻기’라고도 하며 보통 책을

한 권씩 다 배울 때마다 베풀었다. 음식은 흰팥시루떡, 송편, 국수, 경단등을

장만했는데, 특히 송편은 빠뜨리지 않았다. 요즘에도 한 학기가 끝나면 학교에서

이런 행사를 벌이는 곳도 있다.

서당은 마을 양반들과 평민들이 주체가 되어 마을에서 함께 운영하던 사설 교육 기관이었다. 지금의 초등학교와 같은

일반화된 교육 기관으로, 고려 때부터 발달하여 조선 때 널리 퍼졌다. 서당에서 가르치던 선생님을 훈장님이라고

불렀는데 서당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은 훈장님께 수업료로 돈 대신 다른 것을 드렸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것을 드렸을까?

서당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 훈장을 도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접장, 학생인 생도로

조직되어 있었다.양반이나 일반 평민의 자제 중에 나이가 7~8세 정도가 되면 서당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졸업하는 나이는 보통 15~16새 정도였다. 훈장은 아이들의 개인

능력에 따라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들은

훈장님께 수업료로 쌀이나 땔나무, 옷 등을 드렸다.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떼고 나서 벌인 잔치는 무엇일까?

조선 시대에는 서당에 수업료를 어떤 것을 냈을까?

장례란 죽은 사람의 시신을 처리하는 일이다. 오래 전부터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종교나 사회의

제도, 문화의 관습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가령 서양의 바이킹들은 특별한 사람이 죽으면 배와 함께 시체를

화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 부여에서는 ‘순장’이라는장례 풍습이 있엇는데, 순장을

할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무엇을 묻었을까?

순장이란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묵은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의 신하나 부인을

죽여서 묻거나 산채로 묻은 장례 풍습이다. 사람의 권력이 죽어서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굶該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때부터 서주시대까지 순장하는 풍습이 성행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중국의 《삼국지》<위서>에 있는 <동이전>에 ‘부여에서는 귀인이 죽으면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몇백을 헤아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순장묘가 발굴되었다. 확인된 바로는 한 무덤에 적게는 한두 명 에서 많게는 36명까지

순장되어 있었는데, 한두 명의 순장자는 대부분 여자였다. 남편이 죽은 여자를 미망인(未亡

人: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순장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라마다 혹은 민족이나 각 문화권마다 좋아하는 숫자와 싫어하는 숫자가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보통‘7’이라는 숫자를 행운의 숫자로 여기지만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숫자는 다르다. 이 숫자는 외국에서도 완성의 수,

최고의 수 등으로 알고 있는 숫자이다. 하지만 특히 우리 민족에게 생활, 문화,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잇는 수이다. 일상에서도 자주 쓰이는 이 숫자는 무엇일까?

우리 민족은 유난히도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 단군의 건국 신화에서 ‘환웅이 천부인

3개를 가지고 3,0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땅에 내려와 비, 바람, 구름을 관장하는 3명의 신과 함께 세상을

다스렸다’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 삼세번’, ‘내 코가 석 자’, ‘삼척동자’, ‘만세 삼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숫자 3은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인들은 홀수를 좋아하는 우리 나라 사람과는 달리 짝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4는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죽을 ‘사(死)’자와 음이 같기 때문에 싫어한다.

‘순장’을 할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묻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약 1,000년 전, 노르웨이에서는 스키가 실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도구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무슨 일을 했을까?

950년경 노르웨이의 하논이라는 왕은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세금을

걷을까 궁리 하다가 아주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공무원들이 스키를 타고 가서 세금을

걷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 핀란드나 스웨덴 등의 다른 북유럽 국가에서는 스키 부대를 편성해서

적과 싸우는 전투에 내보내거나

우편물을 나르는 일에도 동원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스포츠로 즐기는 스키는 처음에는

재미로 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스키를 재미와 오락으로 타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쯤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스키가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스키(Ski)라는 단어는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의 뜻으로 노르웨이 말에서 유래되었다.

약밥이라고도 불리는 약식은 우리 나라 고유 음식 중의 하나로, 본래 정월 대보름날에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설날이나 잔칫날에도 그 맛을 즐기고 있다. 약식은 보통 찹쌀, 참기름, 꿀(또는 흑설탕), 진간장, 밤, 대추, 실백 등의 재료를

시루에 오래 쪄서 만든다. 그런데 약식은 어떤 동물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떤 동물일까?

신라 제21대 소지왕 때의 일이다. 하루는 왕이 밖으로 놀이를 나갔는데 갑자기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서 봉투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종투의 겉에는 ‘편지를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아니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씌어 있었다. 결국 왕은 봉투를 뜯어 보았는데 편지에는 ‘거문고집을 쏴라’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소지왕은 군졸들에게 당장 거문고집을 쏘게 했는데, 그 안에는 소지왕을 죽이려고 몰래 숨어들었던 두

사람이 죽어 있었다. 그래서 소지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까마귀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귀한 재료를

넣은 검은 밥, 즉 약식을 지어서 바쳤다. 소지왕은 정월 대보름날에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까마귀를

기리고자, 매년 1월 15일을 까마귀 제삿날로 정했다.

옛날 노르웨이에서 스키를 탄 이유는?

약식은 어떤 동물의 은혜를 감사하는데서 유래되었을까?